눈 - 이정록(1964∼) 맷돌구멍 속 삶은 콩들이 쭈뼛쭈뼛 자리를 바꾸는 까닭은 너 먼저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게 아니다 온 힘으로 몸을 굴려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싹눈을 그 짓무른 눈망울을 서로 가려주려는 것이다 눈꺼풀이 없으니까 삶은 눈이 전부니까 1930년대에 시인 백석은 잡지에서 “입을 다물고 생각하고 노하고 슬퍼하라”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분노를 권한다니 조금 이상스러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상황에 대해 분노해야 옳았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가 단 하나의 위대한 분노를 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의 분노는 없다. 위대한 분노는 갈래갈래 쪼개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작은 분노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 분노는 때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