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화장을 하며 - 문정희 (文貞姬·1947∼) [조선/ 2021.07.19] 화장을 하며 - 문정희 (文貞姬·1947∼)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티 로더의 아이라이너로 검은 철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