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종점들 ― 이승희(1965∼ ) [동아/ 2020-07-11] 종점들 ― 이승희(1965∼ )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 데나를 양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발터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베냐민은 천사가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이쯤 되면 철학자 베냐민이 아니라 시인 베냐민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