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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최영미의 어떤 시]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 [조선/ 2023-06-19]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 신선해 보고 또 보았다. 시인이 젊으니까, 뭘 해서 가끔 혼나기도 하는 나이니까 이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지 않아서 혼이 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아침을 먹고 저녁에 저녁을 먹듯 사랑이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젊음의 치기가 느껴지는 시. 젊지만 노련한 ‘쌀’로 시작해 ‘꿈이었다’로 끝나는 정교한 작품이다. 무화과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겉은 거칠게 생겼지만 안은 달콤하다. 무화과 한 상자를 사서 깨..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풍경 달다 - 정호승(1950∼ ) [동아/ 2023-06-17]

풍경 달다 - 정호승(1950∼ )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바람은 서정시인들의 오랜 친구다.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그것을 시인들은 몹시나 좋아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우선, 바람은 알지 못할 곳에서 출발해서는 스치듯 금세 사라진다. 곰곰이 생각하면 마음이 그렇고, 운명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모두 알지 못할 곳에서 시작되고, 분명히 존재했다가, 찰나인 듯 지나가버린다. 그러니까 바람은 우리라든가 우리가 경험하는 뭔가와 닮은 데가 있다. 시인들이 바람을 사랑하는 다른 까닭은, 바람이란 뭔가를 품고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1965∼ ) [동아/ 2023-06-10]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1965∼ )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 지나가던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잠의 신 히프누스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꿈의 신이 되었다. 첫째는 사람에 관한 꿈을 꾸게 만들고, 둘째는 동물에 관한 꿈을 꾸게 했으며, 막내는 무생물에 관한 꿈을 꾸게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신이 겨우 셋일 리 없다. 우리에게는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꿈도 있..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유기동물 보호소 - 김명기(1969∼ ) [동아/ 2023-06-03]

유기동물 보호소 - 김명기(1969∼ ) 버려진 개 한 마리 데려다 놓고 얼마 전 떠나 버린 사람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하는 건 시만 한 게 없지 개 한 마리 데려왔을 뿐인데 칠십 마리의 개가 일제히 짖는다 흰 슬픔 검은 슬픔 누런 슬픔 큰 슬픔 작은 슬픔 슬픔이 슬픔을 알아본다 갈피를 꽂아 두었던 시의 가장 아픈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니 남은 문장들이 일제히 눈가에 젖어든다 슬픔은 다 같이 슬퍼야 견딜 수 있다 많은 책을 혼자 나른 적이 있었다. 배낭에 넣어 등짐으로 지고, 짐수레에도 가득 실어 밀어 옮겼다. 내 짐을 나 혼자 지고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턱 앞에서 끙끙대고 계단에서 멈칫거릴 때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그때 한 택배 기사님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더니 수레를 같이 밀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죄와 벌 - 조오현(1932∼2018) [조선/ 2023-05-27]

죄와 벌 - 조오현(1932∼2018) 우리 절 밭두렁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5월은 좋은 달이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며 햇살은 화창하고 꽃들은 만발한다. 돈을 낸 것도 아니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날씨는 기꺼이 우리를 축복해준다. 이렇게 좋은 달에는 좋은 일을 하고 싶어진다. 결혼식을 하거나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이때의 좋음을 알았는지 어땠는지 부처님도 딱 5월에 맞춰 오셨다. 오는 이가 있으면 가는 이도 있는 법. 어린이도 오고, 어버이도 오고, 스승님도 오고, 부처님도 오는 이 좋은 달에 이 시를 쓴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조오현 시인이라는 명칭보다 오현 스님이라는 부름이 더 자연스러운 그는 일곱 살 어린..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살구 - 이은규(1978∼) [동아/ 2023-05-20]

살구 - 이은규(1978∼)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한다 손차양, 한 사람의 미간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지붕 그 지붕 아래서 한 사람은 한낮 눈부신 햇빛을 지나가는 새의 부리가 전하는 말은 부고처럼 갑자기 들이치는 빗발을 오래 바라보며 견뎠을까, 견딤을 견뎠을까 한 생이 간다 해도 온다 해도 좋을 이제 한 사람은 없고 긴 그늘을 얼굴에 드리운 한 사람만 남았다 살구나무는 잘 있지요 안 들리는 안부는 의문문과 평서문 사이에 있고 살구꽃말은 수줍은 또는 의혹 (하략) 낮 기온이 높아지고 해가 뜨겁다. 우리에게는 그늘이 필요하다. 삶의 난도는 높고 성실해도 쉽지 않다. 내내 달려온 다리와 마음에도 그늘이 필요하다. 기도, 명상, 휴식, 여행. 뭐가 되어도 좋다. 우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업어주는 사람 - 이덕규 시인(1961∼ ) [동아/ 2023-05-13]

업어주는 사람 - 이덕규 시인(1961∼ ) 오래전에 냇물을 업어 건네주는 직업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를 서성이다 냇물 앞에서 난감해하는 이에게 넓은 등을 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중략) 병든 사람을 집에까지 업어다주고 그날 받은 삯을 모두 내려놓고 온 적도 있다고 한다 세상 끝까지 업어다주고 싶은 사람도 한 번은 만났다고 한다 일생 남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고 살아서 일생 남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버티고 살아서 그가 죽었을 때, 한동안 그의 몸에 깃든 다른 이들의 체온과 맥박을 진정시키느라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직업에는 이름이 없다. 농부, 어부처럼 ‘부’ 자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고 의사, 검사처럼 ‘사’ 자로 끝나는 이름도 아니다. 시인은 남을 업어 냇물을 건네주는..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여름밤 - 강소천(1915∼1963) [동아/ 2023-05-06]

여름밤 - 강소천(1915∼1963) 하늘의 별들이 죄다 잠을 깬 밤. 별인 양 땅 위에선 반딧불들이 술래잡기를 했다. 멍석 핀 마당에 앉아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빗자루를 둘러메고 반딧불을 쫓아가면, 반딧불은 언제나 훨훨 날아 외양간 지붕을 넘어가곤 하였다. 반딧불이 사라진 외양간 지붕엔 하얀 박꽃이 피어 있었다. 어린이날은 단 하루뿐이지만 사실 어린이의 모든 나날은 전부 어린이날이다. 그들은 날마다 행복하게 웃고 떠들고, 씩씩하게 뛰어놀고, 안전하게 오고 가야 한다. 어른이 지켜야 할 것에는 국방이라든가 법규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맑은 눈, 말랑한 손바닥, 보송한 머리카락을 지닌 어린이들을 날마다 보살펴야 한다. 조심히 지켜야 할 정도로 아이들은 연약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정도로 아이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서시 - 이성복 (1952~ ) [동아/ 2023-04-29]

서시 - 이성복(1952∼)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나이가 적고 아는 것이 적을 때에는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조금만 신기해도 좋고, 조금만 새로워도 좋다. 작은 것마저 좋아지니까 세상이 반짝반짝하고 웃을 일이 많다. 나이가 많아지면 좋아하는 것이 줄어든다. 좋아서 하는 일은 줄어들고 해야 해서 하는 일이 늘어난다. 의무를 해치우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 같은 건 생각..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란히 - 육호수 시인(1991∼) [동아/ 2023-04-22]

나란히 - 육호수 (1991∼) 소반 위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켤레 나란히 올려두고 기도의 말을 고를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기도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반쪽 달이 창을 넘어 입술 나란히 귓바퀴를 대어올 때 영원과 하루가 나란하다 (하략)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