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김수호 (1940~ )
내가 땀 흘려 농사지은 쌀을
나라에서 공출해 가더니
그게 왜놈 군대의 군량미가 되고
빼앗아 간 놋그릇 제기는
전쟁판의 총탄으로 둔갑하고
소나무를 잘라 짜내는 피같은 송진을
전투기의 기름으로 쓰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웃의 큰놈은 병정으로 끌려가
'덴노 헤카 반자이' 외치며 전사했고
건너 마을 딸부자 둘째는
왜놈 군 위안부로 몸 시주 당하고
인기 가수는 왜놈 군가 음반 내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군들 밥 굶고 살 재간 있나요
일본말 쓰며 선생이나 면서기를 하더라도
식솔들 밥은 먹여야지요.
임금이 어벙하여 나라를 잃은 탓에
순박하고 말 잘 듣는 백성들이
졸지에 친일파로 낙인 찍히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식도 창씨개명 하고서
조상없는 상것을 만들어 버리다니
북방의 만주나 북간도
태평양의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지, 아니면
산골짝에서 백이숙제로 한세상 버릴 걸
나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목숨이라
제 맘대로 끊을 수도 없는데다
시집 장가는 들어가지고
생산한 새끼들을 친일파로 만들다니
모두 어김없이 따라야 하는 게
천륜이 아니던가요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변고
또다시 당한다면
이 늙은이 일생은 빈 깡통
천지신명께 딱 한가지는 맹세하리다
나로써 대를 마감한다고...
넋 나간 나라에 뭘 기대하겠소
백성 깡다구나 헤집을밖에
(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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