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숲 - 황인찬(1988~ )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 신선해 보고 또 보았다. 시인이 젊으니까, 뭘 해서 가끔 혼나기도 하는 나이니까 이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나. 사랑해서, 혹은 사랑하지 않아서 혼이 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아침을 먹고 저녁에 저녁을 먹듯 사랑이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젊음의 치기가 느껴지는 시. 젊지만 노련한 ‘쌀’로 시작해 ‘꿈이었다’로 끝나는 정교한 작품이다.
무화과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겉은 거칠게 생겼지만 안은 달콤하다. 무화과 한 상자를 사서 깨끗이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한 알씩 빼먹다가, 남으면 냉동실에 넣어둔다. 여름날 꽁꽁 언 무화과를 실온에 십 분쯤 두면 아이스케키처럼 사각거린다. 실온에 오래 두면 철 지난 사랑처럼 축 처져서 물이 많이 나온다.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잠깐만 나오는 과일이라 때를 놓치면 끝. 열매를 맺지 못한 짝사랑이 주렁주렁 매달린 무화과의 숲을 지나… 혼나도 좋으니까 사랑이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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