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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최영미♣어떤 시

[최영미의 어떤 시] 자유 (Liberte) - 폴 엘뤼아르 (Paul Eluard·1894~1952) [조선/ 2022-02-28]

설지선 2022. 2. 28. 09:30

[최영미의 어떤 시] 자유 (Liberte) - 폴 엘뤼아르 (Paul Eluard·1894~1952) [조선/ 2022-02-28]






    자유 (Liberte) - 폴 엘뤼아르 (Paul Eluard·1894~1952)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오생근 옮김)



원래 제목은 ‘단 하나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연애시였다. 나중에 제목을 자유로 바꾸어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은밀히 유포되었고, 압제에 저항하는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황금빛 조상”은 돈을, “제왕들의 왕관”은 권력을 상징한다. 부와 권력보다 자유가 소중하다는 말.

시의 중간에 이런 표현들도 좋다. “구체적인 진실 위에/(…)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최전선에서 싸웠던 시인은 자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터. 그가 사망하자 수천의 시민들이 마지막 길을 함께 걸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등단하지 않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이던 나는 엘뤼아르의 사진을 오려 내 방 벽에 붙였고, 나중엔 지갑에 넣고 다녔다. 미얀마와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며, 읽어보는 자유. 권태로운 일상 위에 네 이름을 쓴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자유 Liberte <전문>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驚異)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 켜진 램프 위에
    불 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 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 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대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