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꽃범벅 ― 서상영(1957∼ ) [동아/ 2021-03-06]
꽃범벅 ― 서상영(1957∼ )
꽃 베던 아해가 키 높은 목련꽃 예닐곱 장 갖다가 민들레꽃 제비꽃 하얀 냉이꽃 한 바구니 모아다가 물 촉촉 묻혀서 울긋불긋 비벼서 꽃범벅, 둑에서 앓고 있는 백우(白牛)한테 내미니 독한 꽃내 눈 따가워 고개를 젓고 그 맛 좋은 칡순 때깔 나는 안들미 물오른 참쑥 키 크다란 미나리를 덩겅덩겅 뜯어서 파란 꽃떡 만들어서 쏘옥쏘옥 내미니 소가 히이-우서서 받아먹어서 한 시루 두 시루 잘도 받아먹어서
아하, 햇살은 혓바닥이 무뎌질 만큼 따스웁더라
아해는 신기해서 눈물 나게 슬퍼서 하도 하늘 보며 초록웃음 웃고파서 붉게 피는 소가 못내 안타까워서 속털도 빗겨주고 눈도 닦어주고 얼굴만 하염없이 쓰다듬고 싶어서 깔끌한 혓바닥이 간지러워서 꽃과 같이 하르르 소에게 먹혔더라
이 봄에 꽃들이 너무도 쓸쓸해지면 곁불 쬐러 나온 나비가 겁먹은 왈츠를 춘다
소는 제 안만 디려다보고 아릿아릿 아려서 시냇같이 줄줄 눈물만 흘려서 발굽 차고 꼬릴 들어 훌~훌~치달려서 철쭉송화 우거진 산에 숨어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아하, 앞산에 봄이 오자 꽃부텀 진다 |
서양의 기사는 말 타고, 창 잡고, 용 잡으러 다녔다.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영웅이 용을 때려잡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 사람들이 피에 물든 노래를 즐겨 부를 때 우리는 꽃에 물든 노래를 잘도 불렀다. 기사 대신 아이가, 말 대신 소를 타고, 창 대신 풀피리 불며 들판 찾으러 다녔다. 소 치는 아이와 아이를 태운 소와 들판이라니. 이 삼박자는 우리 마음을 꽉 채운다. 소 치는 아이는 평생 본 적도 없는데 마치 그들의 목가적인 풍경은 오래 본 듯 익숙하다.
그래서 이 시의 첫 구절을 읽자마자 알아봤다. 아, 이건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구나. 너무나 가고 싶은데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구나. 시에서 아이와 소는 말도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건 잃어버린 고대에서나 가능했던 충만함의 세계다. 시에서는 향내만 풍길 뿐, 저잣거리의 기색 따윈 없다.
이상화 시인이 말한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다. 흰 소에게 꽃범벅, 풀범벅을 먹이는 꿈을 꾼다면 그 밤은 몹시 설레리라. 하지만 요즘 이런 꿈을 꾼다면 설렘 전에 슬픔부터 느끼게 될 것이다. 올봄에는 저 목련꽃, 제비꽃, 죄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피었다가 사라질 테니까. 하늘 보며 초록 웃음 짓고 싶은 마음은 아해나 우리나 마찬가지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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