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성탄제 ― 김종길(1926∼2017) [동아/ 2020-08-29]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1926∼2017)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라디오에서든 신문에서든 매년 12월이면 이 시가 꼭 소개되곤 했다. ‘성탄제’는 국민 겨울시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성탄제’가 자꾸 생각난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무슨 ‘성탄제’냐 하실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데 흰 눈과 빨간 산수유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시의 본질은 거기에 없다. ‘성탄제’는 절망적 상황과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병이 치유로, 고통이 희망으로 바뀌는 기적. 그것이 바로 이 시의 핵심이다.
지금은 8월. 흰 눈은커녕 아직 산수유 열매도 익지 않았는데 이 시가 떠오르는 까닭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이 치유로, 고통이 희망으로 바뀌기를 진실로, 진실로 바라고 있다.
시와 우리의 상황은 많이 닮았다. 요즘 우리는 밖으로 나다닐 수 없다. 길거리에 나가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마치 찬바람을 피해 칩거하는 겨울이 된 것처럼 말이다. 행동 양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우리는 이미 엄동설한 중에 있다. 자꾸 움츠러들며 작은 희망을 아쉬워한다.
한 어머니가 아픈 아이의 병실을 구하지 못해 슬퍼하는 글을 읽었다. 아프지 않은 아이를 집에 두고, 아픈 아이만 데리고 집을 떠나야 했던 이야기도 읽었다. 내내 버틴 의료진의 손이 땀으로 퉁퉁 부은 것도 보았다. 내 아이, 내 동생, 내 가족이라면 누군들 함께 가슴을 치지 않겠는가. 아픈 사람, 목숨을 지키는 사람, 목숨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힘든 겨울이 진행 중이다. ‘성탄제’가 필요한 계절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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