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1948∼1991) [동아/ 2019-12-07]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1948∼1991)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시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지리산, 그중에서도 뱀사골, 그리고 5월이다. 그의 시집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지리산의 봄’(1987년)이다. 오늘의 시는 그 유명한 시집 가운데서 골랐다. 시집에는 ‘편지 연작’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연작 10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10번을 사람들은 일등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는 제목 때문일 것이다.
이 제목 앞에서 ‘멈칫’하지 않을 사람은 적다. 생은 생각보다 길고, 우리는 사람을 생각보다 쉽게 잃는다. 우리는 오늘도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보내면서 잃은 사람을 잊고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잊었던 그 얼굴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시인은 그것을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차오르면 속수무책이다. 그리워 그냥 울밖에. 시에서 그 사람 보고 싶어 꾹꾹 참아가며 우는 모양이 참으로 애잔하다. 아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서점에 들르신다면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을 들춰 보시길 바란다. 바쁘시다면, 시집의 뒤표지만이라도 돌아보시라 추천드린다. 시인의 말이 실려 있다. 바쁠 당신이 아쉬워 조금만 옮겨 드린다.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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