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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 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 [조선/ 2019.06.03]

설지선 2019. 6. 3. 12:03

[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 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 [조선/ 2019.06.03]

'영원한 在野' 장기표씨


"사실 나는 데모할 수 있는 대학생이어서 특혜를 받았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다. 농사 안 짓고, 공장에서 일 안 하고, 기업도 안 하고 전부 다 데모만 했으면 나라 안 망했겠나. 사회는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 발전한다."

장기표(74)씨를 만난 것은 열흘 전 '光州와 봉하마을, 누가 불편하게 만드나'라는 필자의 칼럼에 짧게 인용된 위의 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 관한 한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 민청학련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사건(1977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년), 5·3인천사태(1986년), 중부지역당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대접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출소 후 동문 모임에 가니 내게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와 친구가 있는 좋은 환경이어서 데모할 수 있었지,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민주화 의지가 있어도 데모할 수 있었겠나. 당시 나를 취조한 수사관에 대해서도 '인간말종' '독재자 후예'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인생이 뒤바뀌었으면 나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위해 일했을 것이다."

장기표씨는 “나같이 데모만 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장기표씨는 “나같이 데모만 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한 '독재자 후예'라는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런 말에 정말 분노했다. 대통령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말을 해도 되는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안 했다고 다 '친일파'라고 할 수 있나.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장에서 "1980년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에 함께 못한 것에 대해 그 시대 한 시민으로서 참 미안하다"며 말을 못 이었다.

"그렇게 마음 아프고 빚진 인생으로 살았다면 왜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은 위선(僞善) 아닌가. 권력 유지를 위한 게 아닌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문 대통령의 진심을 왜 의심하는가?

"1984년 내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조직하려고 전국을 돌았다. 부산에 갔을 때 학생운동 전력이 있다는 문재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그에게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이런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강경해서 그 뒤로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런 분이 이제 와서 민주화 운동을 전매특허 낸 것처럼 하기에 과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시위 전력으로 구속된 적 있고 그 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은 사실 아닌가?

"학생 데모를 잠깐 했을 뿐이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인권 변호사로 포장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6월 항쟁(1987년) 이후에 민주화되면서 시국 사건과 노동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 사건 몇 건을 돈 받고 맡은 적 있었는지 모르나 인권 변호사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내세울 만한 게 있었으면 그가 벌써 밝혔을 텐데 수임 사건 내역에 그런 게 없다."

―장 선생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안 된다'며 기자회견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가?

"그는 애초에 정치할 뜻이 없었고 국정 운영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노빠'의 아바타로 나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나라를 끌고 갈 수 있겠나. 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에게는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앞으로 문재인에게는 최순실이 열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무슨 근거로 '최순실 열 명'을 말했나?

"나는 '운동권 내부 정서'를 잘 알고 있다. 그쪽 동네에선 운동 경력에 밀리면 꼼짝 못하는 법이다. 문재인의 학생 시위 전력은 운동권 프로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에게는 이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운동권의 포로가 된다. 그쪽의 강경 주장에 따라가게 된다. 정부 부처마다 적폐 청산 기구나 과거사위원회 같은 게 줄줄이 설치된 것도 어느 주장에도 그가 반대를 못 하기 때문이다. 반대하면 제대로 운동도 안 해본 사람으로 볼까 봐 겁내는 것이다."

―과거에는 혹 그런 기분이 있었을지 모르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것에 지배된다고 보나?

"운동권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런 정서에 지배되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도 이런 운동권 콤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이다. 현 정권에서 민주노총에 절절매는 것은 단순히 촛불 집회 때의 부채 의식 때문은 아니다. '운동권 사쿠라'는 원래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과거에 '청계피복노조'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을 해왔다. 탄압에 맞서 겨우 키워냈던 노동 조직이 이제는 법 위에 군림한 것처럼 됐다.

"그때는 약자인 노동자의 조직을 만드는 게 옳았다. 이제는 내 개인적으로 광화문에서 최대의 기득권 집단이 된 민노총 규탄 대회를 한 적 있다. 대기업 위주의 민노총 조합원은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3배를 받는 노동 귀족들이다."

최보식 선임기자와 장기표씨 ―다시 5·18로 돌아가면 장 선생은 당시 무엇을 했나?

"1979년 말 출소한 뒤 김대중씨가 중심이 된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조직국장을 맡았다. 시위 조직 및 배후 조종을 했던 것이다. 이게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나는 3년 반 도망 다녔다. 김영삼 정부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가 됐다. 보상을 위해 유공자 등록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안 했다. 그 뒤 다른 시국 사건도 재심(再審)을 통해 보상이 이뤄졌지만 나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민주화 보상금을 다 받았으면 몇 억원은 됐을 텐데 왜 신청을 안 했나?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 등은 다 실체가 있었고 당시 실정법을 위반했다. 정권이 바뀌어 재심 법정에서 해석을 달리해 무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행위는 오직 역사 평가에 맡기고 싶었다."

―재심 법정이 일종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한 재심(再審)이어서 탐탁지 않았다."

―그 시절에 희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운동도 안 하고 수백억씩 해 처먹는 놈들도 있는데, 큰돈도 아니고 몇억 받는 걸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의무로 여겼고 또 입만 벌리면 나라와 민족 운운했지 않나. 그걸 돈으로 보상받으면 우리의 명예는 뭔가. 더욱이 보상금은 박정희나 전두환이 주는 돈도 아니고 국민이 낸 돈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받지 말자'고 말한 적 있었나?

"혼자 잘난 척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입밖에 안 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서울대 교수인 H씨가 교육부 장관이 되자 1980년대 해직 교수 60여명을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선정해 각 1억3000만원씩 80여억원을 나눠줬다. 광주와 직접 관련된 사람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1980년 그해가 아니라 1985년, 1986년에 해직된 교수도 있었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미 복직됐고 밀린 봉급을 2억~3억원씩 받았다. 높은 자리에도 많이 갔다. 그렇게 다 받아먹고 또 보상금을 주고받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민주화 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어 말을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나쁜 놈들'이라며 분노해 글을 썼다."

―장 선생은 재야(在野)에서는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정치권 진입을 시도한 뒤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0년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게 시작이었다. 그 동지들은 현실 정치를 깨닫고 대부분 YS 진영으로 들어가 다음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따라가지 않았는데.

"과거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읽고서 정보화 사회가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만들었다. 기존 정당으로는 이를 구현할 수 없었다."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했고 낙선했다. 이 때문에 '창당 전문가'로 조롱받았다. 창당 행적을 보면 같은 이상이나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 정당의 공천 탈락자들과 손잡거나 이념이 다른 신생 정당과 합당하는 식이었다. 그럴 바에는 기존 정당에 들어가는 게 맞지 않았나?

"당을 만들려면 그런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따라온 거지, 당의 코어(핵심)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기존 정당은 우리나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해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정치는 현실과 세력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재오 전 의원이 "이명박 정권 때 장기표에게 지역구 공천과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말하더라. 이 말을 듣고 장 선생을 다시 봤다. 하지만 기존 체제에 들어가 뜻을 구현할 수도 있지 않나?

"과거 김대중 정권에서도 나를 원했다. 한나라당에서도 김문수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 최상위 순번의 전국구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내 뜻을 구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는 거지. 나는 기존 정당의 한계를 지적해왔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안 지키면 되겠나." [최보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