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막신 ― 이병철(1921∼1995) [동아/ 2019-01-12]
나막신 ― 이병철(1921∼1995)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우리 집 둘째 꼬마는 귀신이 나올까 봐 화장실에 혼자 못 간다. 귀신이 무섭다니 다행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무서운 것투성이인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
나는 귀신보다 마음이 무섭다. 때때로 마음이 나를 지옥에 내려놓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터져 마음이 쑥대밭이 됐다. ‘해결할 수 없으면 놓아야 한다.’ 머리에서는 이렇게 지시가 내려오는데 마음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쩌지, 어쩌지.’ 마음은 이 난장판을 어떻게든 청소하고 싶어 한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어야 할 때 나는 이 시를 읽는다. 반드시 잘되어야 한다는 좋은 마음이 숨통을 조여 올 때도 이 시를 읊는다. 매인 것 없이, 집착하는 일 없이 선선히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이병철의 ‘나막신’은 바로 그때를 위한 작품이다.
뭔가 엉킨 일이 있다면 이 시를 따라 해 보자. 머리도 감고, 낯도 씻으며 마음의 괴로움이 씻겨 나가길 빌어보자.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벌렁댄다면 물도 꼭꼭 씹어 천천히 마셔보자. 그러고는 마치 이 시에서 그랬듯 쓸쓸하고 호젓하게 다 놓고 일어나 보자. 상처받은 짐승처럼 방 안을 빙빙 돌기보다는 밖에 나가 한참 걸어보자. 길바닥에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될 일이지만, 괴로운 마음 따위야 버려도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온 마음에 부옇게 뜬 오염물들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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