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文 정부엔 '사대부 유전자'가 있다 - 박정훈 논설실장 [조선/ 2018.12.21]
대통령 언행이 달라졌다고 한다… 정권의 유전자는 그대로인데 언어만 바꾼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지금 벌어지는 적폐 정국에서 조선조 사화(士禍)의 살육극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가차 없는 잔혹함 때문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 이념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패배한 진영의 수많은 선비가 고문당하고 주살(誅殺)됐다. 가족·친척·제자까지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멸족(滅族)의 참화가 벌어졌다. 그것은 공포의 통치술이었을 것이다. '피의 경고'로 저항의 싹을 자른 것이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사건에서 권력의 '살기(殺氣)'를 느꼈다는 이가 많다. 앞 정권의 상징적 인물을 찍어 탈탈 털었다. 온갖 혐의를 흘리고 수갑 채운 모습을 노출해 망신 주었다. 반드시 잡아넣겠다는 의지를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빈소에서 현역 군인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겁먹은 군인들이 알아서 긴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바란 일인가.
과거 정권을 겨냥한 적폐 수사는 2년째 계속되고 있다. 100명 넘는 전(前) 정권 인사가 구속됐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 선고된 징역형 합계가 이미 100년을 넘었다.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칼을 휘두른 적은 없다. '현대판 사화'란 말이 나온다. 조선의 지배층은 정적(政敵)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유교 근본을 어지럽힌 도적)으로 몰았다. 이 정권은 '적폐 세력' 딱지를 붙여 정치적·사회적·인격적으로 매장하고 있다. 적폐 청산도, 사화도 반대파 씨를 말리려는 무관용의 권력 행위나 다름없다. 수백 년을 사이에 두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흥미진진한 책이 있다. 서울에서 8년 유학하며 한국이라는 수수께끼와 격투한 일본인 교수의 한국 연구서다. 저자는 한국을 '리(理)의 사회'로 규정했다. 유교 이기론(理氣論)에서 '리'는 관념의 철학을 말한다. '기'가 물질과 경험론이라면 '리'는 도덕과 정신, 명분과 형이상학이다. 주자학이 꽃핀 이래 한반도사(史)는 '리'가 지배한 역사였다. '리'의 독주가 사화와 소중화론을 낳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으로 이어졌다. 주자학적 관념의 세계에 빠진 나머지 고립과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은 여전히 '리'가 살아 숨 쉬는 '철학의 나라'라는 것이다.
저자는 북한을 '리기(理氣) 사회주의의 완성체'로 보았다. 내 눈엔 문재인 정권도 영락없는 '리' 철학의 계승자처럼 비친다. 실용보다 이념, 성장보다 분배, 부국강병보다 포용 국가를 추구하는 점이 똑같다. 조선의 사대부는 농본(農本) 사회를 지향했고, 문 정권은 노동 중심 사회를 말한다. 관(官)의 역할을 강조하는 '큰 정부' 철학은 주자학의 왕도(王道) 정치와 일맥상통한다. 도덕적 우월 의식에 사로잡혀 불통(不通)을 치닫는 것까지 똑같다. 문 정권이 주자학을 벤치마킹하진 않았겠지만 빼박은 듯 판박이다.
주자학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정부도 반(反)기업 기조를 치닫고 있다. 사대부가 장사꾼 천대하듯 기업을 경시하고 기업인을 낮춰본다. 정권 중추부를 운동권 출신이 장악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운동권은 힘들게 돈 벌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남의 돈을 가져다 쓰기만 했으니 기업 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이윤보다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듣기엔 숭고하지만 돈 버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고가 깔려 있다.
문 대통령 스타일은 '사대부 리더십'에 가깝다. 뜻과 가치를 숭상하고 이념과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고담준론을 즐긴 사대부처럼 현실 감각은 떨어진다. 문 대통령의 '유체 이탈' 현실 인식은 종종 논란을 불렀다. 지난주에도 고용부 방문 자리에서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실제로 너무 빠르냐"는 질문으로 사람들을 '멘붕'에 빠트렸다. 최저임금 쇼크로 서민 경제가 쑥대밭 됐다는 뉴스가 1년 내내 쏟아졌다.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을 대통령만 모르는 듯 말하고 있다. 세상 물정 어두운 옛 사대부가 이랬지 싶다. 보기 싫은 것은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언행이 달라졌다고 한다. 갑자기 경제 활력, 투자, 산업 정책 같은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선 노선 전환의 기대감도 나온다. 그러길 간절히 바라지만 나는 비관적인 편이다. 청와대 어법(語法)을 빌리면 이 정권은 '사대부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만 바꾼다고 정권의 유전자가 달라지진 않는다. 실제 정책과 행동을 고쳐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 뼛속까지 운동권 DNA인 청와대 참모진을 그대로 놔둔 채 국정 전환을 얘기한다면 말장난일 뿐이다. 눈앞 위기만 피하려는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공자(孔子)의 후예'와도 같은 정권을 목격하고 있다. 고립된 이념의 성(城)에서 나오지 않으면 이 정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정권 임기는 시시각각 지나가는데 앞날은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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