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호박 ― 이승희(1965∼ ) [동아/ 2017-11-17]
호박 ― 이승희(1965∼ )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걸까
제 속 가득 씨앗들 저리 묻어두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지.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본다
사리처럼 박힌
단단한 그리움.
왜 세상의 많은 엄마들은 엄마가 됨과 동시에 둥근 얼굴과 둥근 체형으로 변해 가는 걸까. 젊었을 때 날카로운 턱선, 샤프한 눈매의 남자들도 아빠가 되면서 푸근푸근 둥글어 가는 걸까. 엄마가 더 엄마가 될수록, 아빠가 더 아빠가 될수록 그들은 둥글해진다. 나잇살, 운동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전혀 다른 이유를 말해준다. 사람이 둥글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늙은 호박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시에 나오는 호박은 사실, 엄마이며 아빠다. 또는 할머니이고, 우리 세상의 좋은 어른들이다. 그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열심히 둥글어지는 중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엎드려 있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미련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호박은, 그런 오해를 거두시라고 말해준다. 가을의 호박은 퍽 위대한 일을 하느라 늙고 둥글게 변한 것이다. 그는 품 가득 씨앗을 담아 키우고 있다. 어여쁜 녀석들 등 밤낮으로 두드려주고 있다. 그러려고 멋진 유혹들 모두 사양하면서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온 생애를 바쳐 씨앗을 사랑하는 건 결코 나쁘지 않다. 씨앗을 잘 사랑하려고 자기 이름을 덜 키우는 사람은 바보나 낙오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 구석구석 잘 익은 호박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훨씬 훤해질 것이다. 낙엽 지고 쓸쓸한 밭에서 잘 익은 호박을 만나면 반갑고 뿌듯한 법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많고 좋은 엄마 아빠들, 좋은 어른들은 호박 같은 자신을 더 칭찬해 줄 필요가 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내려왔으면 뭐 어떤가. 그들은 지금 훌륭하게 둥글어지는 중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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