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벼랑 끝 ― 조정권(1949∼2017) [동아/ 2017-11-10]
벼랑 끝 ― 조정권(1949∼2017)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등산을 즐기는 분들은 알 것이다. 추운 산 깊은 곳에서 숨을 쉬면 숨이 다르다. 콧속에 차갑고 맑은 바람이 들어올 때의 그 감각이란. 뭐랄까, ‘상쾌함’이나 ‘신선함’이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공기가 춥고 맑은 칼날이 되어 아프지 않게 폐부를 관통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조정권 시인의 시가 그랬다. 맑고 춥고 날카로웠다. 시인의 대표작은 ‘산정묘지’로 알려져 있는데, 대표작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도 그러했다. 시들이 마치 추운 산에서 쉬는 숨 같다. 내가 좋아하고 다른 이들도 좋아하는 ‘벼랑 끝’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고많은 유행가와 시인들은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절절한지 말해왔다. 그런데 이 시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좇지 않는다. 시가 원하는 것은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다는데 버리기가 쉬울까. 어려우니까 시인은 궁벽한 곳까지 찾아간다. 자꾸 차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벼랑만 골라 보고 벼랑만 골라 걷는다. 거기에 눈까지 내리니 사방이 깜깜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면벽 수행하는 구도자의 마음 풍경이 이 시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활활 타오르던 마음은 어느새 재가 되었다.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뿌리 내린 생각은 저기 피어난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았다. 비우고 비웠더니 추운 맑음이 더 춥고 더 맑아졌다. 이런 시를 썼던 조정권 시인이 얼마 전 별세했다. 이른 아침에 차가운 공기를 접하게 되면 한동안 그의 시가 생각날 것이다. 그는 이제 벼랑 너머, 가장 춥고 맑은 세계로 가버렸으니까.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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