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대통령의 존재 이유 -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 2017.11.04]
'국가 존재 이유' 말한 대통령, '국가 존속 조건'을 더 고민해야국민 위한 평화 강조하려면 국민의 尙武 정신도 고취해야
문 대통령이 그제 국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세 차례 말했다. 먼저 세월호와 촛불 집회에서 "국민들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고 했다. 부정부패·불평등·불공정을 몰아내 달라며, "아무리 노력해도 개인의 힘만으로는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고발했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세월호 이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 정부의 위기 관리 시스템이 고장 나 있었고, 유가족과 국민의 분노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쪽으로 번졌다. 비슷한 목소리가 넘쳤고, 책도 여럿 나왔다. 여기에 올라탄 문재인 정부는 내려올 수가 없다. 정권 탄생의 근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는 구별해야 한다. 지지율 12%까지 내려갔던 노무현 정부가 곧 대한민국이 아니었듯 탄핵당한 박근혜 정부가 그대로 대한민국은 아니다. 당신들의 현 정부도 그렇다. '촛불'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물을 수는 있어도, 대통령 연설문을 만드는 '청와대'는 달리 표현해야 했다. 엄밀히 말해 그 책임은 국가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 대통령의 존재 이유에 닿아 있다.
문 대통령은 손수 국가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국민은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어려울 때 국가가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했다. 크게 그른 말은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의 '고단한 삶'과 '어려울 때'를 어루만져 위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부와 국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정권은 그리 못해도 국가는 국민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봐도 나라를 크게 도약시킨 지도자는 달콤한 말에 앞서 고통을 같이 짊어지자고 국민을 이끌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가가 무엇을 해준다는 약속보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국민에게 물었다.
윤리보다 국가가 앞선다는 '국가 이성(raison d'etat)'의 논쟁사를 들출 생각은 없다. 그만큼 한가롭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가의 존재 이유'보다 '국가의 존속 조건'을 고뇌할 때다. 추락이냐 번영이냐, 절멸이냐 영속이냐, 그런 갈림길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다. 국민을 향한 국가의 존재 이유는 때론 상대적일 수 있지만, 국가의 존속은 절대적이고 처절한 조건을 딛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했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국민에게 성실하게 대답해야" 한다며, "나라답고 정의로운 국가를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전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그동안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국민들께 이제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제 대통령에게 다시 묻는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 국가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대통령은 국가 탓을 하는가. 문재인 정부 이전의 국가는 국가도 아니었는가. 아니 그보다는 국가와 국민이 동일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은 쪼갤 수 없다. "국가를 돌려주겠다"니, 대한민국이 그동안 외세 강점 세력에게 빼앗긴 상태였는가.
'잘되면 내 덕, 못되면 조상 탓, 원님 탓.' 이것은 지난 세기 한강의 기적을 일구면서 우리가 떨쳐버린 정신적 폐습이었다. 청와대 연설팀은 지금 그 폐습을 되살리고 있다. 전(前) 정권 탓과 적폐 프레임이 바로 '조상 탓'이고,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장담하다 어긋나면 그 게 바로 '원님 탓'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평화와 비핵을 강조하면서 왜 전쟁을 각오하는 상무(尙武) 정신을 곁들이지 못하는가. 모든 개인을 국가가 떠맡으면 지금껏 자립정신으로 땀 흘려온 젊은이는 어찌 되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청와대는 국가의 존재 이유와 대통령의 존재 이유를 구별 못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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