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천수답 ― 이성선(1941∼2001) [동아/ 2017-06-09]
천수답 ― 이성선(1941∼2001)
도시의 길들은
바둑판 줄처럼 구획져 뻗고
인간들 마음도 그 길 따라 굳어지고
마침내 이 땅 들의 논들도
모두 가로세로 반듯하게 정리 되어
바람조차 조심히 비켜 간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골
하늘물만 받아서 벼를 기르는 천수답
밤에는 별빛을 기르고
개구리 소리만 가득한 골짜기
논배미가 너무 작아
사람의 손으로만 가꾼다.
쟁기와 쇠스랑이 유일한 농기구
구불구불한 논둑의 하늘물받이 논
층층으로 계단이 진 사다리 논
이곳에서만 아직
농부의 음악이 들린다.
사람과 하늘이 단독으로 만난다.
밤마다 큰 별이 내려와 잠드는 곳
하늘의 눈물이 벼를 기른다.
한참 세상 시끌시끌한데 농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릴 참이다. 농부들은 언제 비가 오실까 하늘에만 귀를 대고 있다. 비가 적어 가뭄이 지면 농부는 속이 타고 입이 마른다. 아직 뿌리도 안 내린 어린 싹들 어찌할까. 하늘을 자주 쳐다볼 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돈 때문에 농사짓는 농부는 있지만, 오직 돈 때문에만 농사짓는 농부는 없다. 생명을 키워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공들여 키우면 사랑하게 된다. 씨도, 모종도, 줄기도 모두 모두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니까 농부는, 힘이 많이 드는 사랑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하는 농부의 마음을, 함께 걱정하기 위해 이 시를 읽는다. 시의 제목은 ‘천수답’. 아주 착하고 맑았던 한 시인이 말하는, 농부들의 위대함에 대한 시이다. 천수답은 오직 하늘의 물만 쓸 수 있는 논이다. 높고 높아 기계음은 끼어들 자리가 없고, 오직 농부와 논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가끔씩 농부와 천수답은 서로 밀고 당기며 힘겨루기도 할 것이다. 그 외의 모든 날들에 농부와 논은 다정하게 정을 주고받을 것이다. 벼는 저절로 자란다고 말할 수 없다. 날마다 쌓인 농부의 마음이 바로 이삭이 되고, 곡식이 된다. 그 사랑의 일과를 어여삐 여겨 천수답의 별빛은 유독 밝고, 개구리 소리는 청명하다.
농부는 허리와 손을 아끼지 않고 천수답을 사랑한다. 이 위대한 장소를 시인은, 농부의 음악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라 칭송한다. 그런데 별들마저 사랑한 이곳이 가뭄을 당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시인의 말처럼 평소의 천수답은 ‘하늘의 눈물’로 유지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의 천수답은 ‘농부의 눈물’로 겨우 연명해 가고 있는 셈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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