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수라(修羅) - 백석(1912∼1996) [동아/ 2016-05-06]
수라(修羅) ― 백석(1912∼1996)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이 시는 실화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거미 한 마리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밤, 시인이 앉아 있는 자리에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시인은 무심코 그것을 문 밖으로 내던진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다른 거미, 그것도 큰 거미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시인은 마음이 찌릿해진다. 큰 거미는 어미 거미겠지. 아까 그 작은 거미를 찾으러 왔겠지. 이런 생각에 시인은 몹시 미안하다. 그래서 큰 거미를 작은 거미 버린 곳으로 보내 준다.
이러고 말았으면 실화는 시가 못되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정말 작은 새끼 거미가 등장했다. 그 새끼는 얼마나 작은지, 집중해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발이 보일 정도로 작다. 그 거미를 보고 시인은 가슴이 메어온다. 너는 분명 아까 그 작은 거미의 동생이고 아까 그 큰 거미의 아가구나 싶다. 졸지에 형도 없어지고, 어미도 없어졌으니 이 작은 것은 어찌 살까. 형도 어미도 멀리 내던진 시인은 미안한 마음에 쩔쩔맨다.
가족은 함께 사는 것이다. 어미 거미가 작은 거미를 찾으러 나오는 것처럼, 아가 거미가 “엄마 어디 있어” 울며 따라오는 것처럼 줄줄이 서로 연결되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큰 손이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았다. 과연 저 어미는 아들을 찾았을까. 아가는 엄마에게 안겼을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시인은 잠을 못 잤을 터. 5월에는, 가족의 달 5월에는 이렇게 수라 같은, 지옥 같은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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