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 최영미 (1961~) 컴퓨터를 끄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설겆이를 하다 말고 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느 소년도 총을 내려놓고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몸은 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그들의 경기는 유리처럼 투명하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어느 선수가 심판을 속였는지, 수천만의 눈이 지켜보는 운동장에는 위선이 숨을 구석이 없다 하늘이 내려다보는 푸른 잔디 위에 너희들의 기쁨과 슬픔을 묻어라 2005년에 출간한 시집 ‘돼지들에게’에 실린 시. 이 시를 쓸 무렵 나는 혈기왕성한 사십대였고, 길을 가다 공이 내 앞에 굴러오면 공을 차고 싶어 발이 근질거렸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는 문단 권력에 대해 분노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