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이 반짝인다 / 첫추위 - 장석남 (1965~ )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아 둬”를 애걸하곤 했는데, 내가 저를 무서워하는 줄 어떻게 알고 친구네 강아지는 나만 보면 크게 컹컹 짖었다.
“개밥 그릇” 뒤에 “개 발자국 아래”를 붙인 게 신의 한 수. “가장 낮은 자리”와 “왕관”의 대비도 근사하다. 왕관보다도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반짝이는 살얼음이 아름답다는 역설. 시보다도 예술보다도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2 김수호-조선가슴시 > 최영미♣어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영미의 어떤 시]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동아/ 2023-12-25] (0) | 2023.12.26 |
---|---|
[최영미의 어떤 시] 눈보라 - 문태준 (1970~) [조선/ 2023-12-11] (0) | 2023.12.24 |
[최영미의 어떤 시] 인연 - 황인숙(1958~) [조선/ 2023-12-04] (0) | 2023.12.04 |
[최영미의 어떤 시]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조선/ 2023-11-27] (0) | 2023.11.27 |
[최영미의 어떤 시] 감 - 허영자(許英子 1938~) [조선/ 2023-11-23] (0) | 202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