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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의 시:선] 밤과 국수 [문화/ 2023-01-04]

설지선 2023. 1. 4. 13:24



      심야식당 - 조말선


      흰 김 속에서 육수가 끓고 국자가 부딪치는 소음이 성명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을 한 솥에 넣고 끓인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에서 한 솥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동시에 놀라고 동시에 웃는다

      동시에 각자의 시선을 찾아가서 동시에 표정을 돌려놓는다


      (조말선 시집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밤과 국수




느닷없이 왕복 8시간 거리 출장이 잡혔다. 대개 그런 일정은 틈이 없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도 빠듯하지 않으려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둘렀는데도 간신히 제때에 도착했다. 일을 하다 보니 점심 식사를 걸렀다. 일을 마친 뒤에는 식욕이고 뭐고 싹 사라지고 얼른 돌아가 눕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줄행랑치는 사람처럼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제야 허기가 몰려왔다. 도착했을 땐, 식당들 문 닫았을 늦은 밤. 적막한 기차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땅한 곳이 없구나 포기하려는데 국수, 라 적힌 간판이 보이는 것 아닌가. 홀린 듯 가게의 문을 열었다. 거기에 나처럼 지친 사람 서넛이 국수를 삼키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마치 식구처럼 반가웠으나, 식당 주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오늘치 영업이 끝났다고 하는 거였다. 평소 같았으면, 돌아섰을 나였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곤한 식욕을 달래고 있는 이들과 한 무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무거나 좋으니 한 그릇만 팔아달라고 사정했다.

초로의 가게 주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식당 안 사람들을 보다가 식은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내일의 손님이 앉아야 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행복하다 여기면서. 이렇게 쉽게 행복을 느끼는구나 깜짝 놀라면서.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평생 잊지 못하게 맛있는 멸치국수를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았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