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눈 - 김광규(1941~)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사랑이란 서로의 바깥이 되는 것. 편안하게 읽히나 깊은 여운을 남기는 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이 없어도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 겨울 여행을 며칠 앞두고 ‘밤눈’을 읽었다. 겨울밤 노천 역이 얼마나 춥고 을씨년스러운지, 밤늦게 서울역에 내려본 사람은 알리라. 저 멀리 보이는 따스한 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전동차에 올라타 기어이 내 방에 도착했을 때, 칼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는 행운에 나는 감사했다.
이 시가 수록된 김광규 선생의 시집 ‘좀팽이처럼’ 뒤에 붙은 해설에서 평론가 이남호는 이렇게 썼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뚦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 그의 시는 또렷하고 건강하고 욕심이 없다. 이 살벌한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들은 무슨 대단한 지식이나 논리가 아니라 불현듯 떠오르는 웃음, 따뜻한 온기가 아닐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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