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카테고리 없음

[유희경의 시:선] 차례가 온다 [문화/ 2022-10-26]

설지선 2022. 10. 26. 14:10

 

 

흼 - 김준현

 

글자들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노화라고 생각한다. 눈살을 찌푸리고 안경을 코에 걸치는 것을 늙음이라고 생각한다. 콧등에 진 주름을 얼음에 간 금이라고 생각한다. 곧 깨질 거라고 생각한다.’

(김준현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차례가 온다


“좋은 일이 있어. 밥 사줄게.” 대뜸, 점심을 먹자는 선배에게 그 좋은 일이 무어냐고 채근을 해봐도 소용이 없다. 바쁘지만, 약속을 훗날로 미뤄보고도 싶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선배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간다. 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묻는다. “좋은 일이 뭐예요. 궁금해 죽겠어.”


“나는 배고파 죽겠다. 밥부터 먹자.” 숨넘어갈 것 같은 나를 두고 선배는 메뉴판을 본다. 그러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안경을 꺼내어 쓴다. 낯설다. 내 생각을 읽었나 보다. “노안이 와서. 이게 없으면 글자 읽기가 힘들어.” 한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한탄한다. 선배 차례구나. 말만 선배지 친구나 다름없는 그가 돋보기를 쓰다니. 곧 나의 차례가 온다는 뜻이겠다. 그럴 만하다 싶다가, 너무 이르다 억울해지기도 하고. 내 나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되었나. 늘 똑같은 것 같다. 어릴 적 만났던 어른들은 훨씬 의젓하고 현명했다. 나는 여전히 철없고 어리석다. 어쩐지 슬퍼진다. “선배 돋보기 잘 어울리네. 지적으로 보여.”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건넨다. 선배는 들은 척도 않고 메뉴를 골라 주문을 한다.

이것이 사람의 순서다. 순리이다. 나이가 들고 변화가 생기는 것은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나의 다음 역시 돋보기가 아닐 수 없겠지. 쓸쓸하지만 어쩔 수 있나. “근데, 좋은 일이 뭐야.” “없어. 바쁘다고 굶고 다니는 거 같기에 한 끼 사주려고 그랬어.” 속은 게 분한데 어쩐지 멋있다. 어느새 선배는 돋보기에 걸맞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구나 싶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본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