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꿈과 근심 -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 [조선/ 2022-03-21]
꿈과 근심 -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백여 년 전에 쓰여진 시인데 그다지 낡아 보이지 않는다. 근심이 많아 잠 못 이루는 밤, 밤은 길고 새벽은 짧다. 꿈에서 님을 만났는데 누군들 깨고 싶으랴. 시에 나오는 ‘님’은 누구일까?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은 부처님이라고 국어 시간에 배웠다. 과연 그럴까? 그는 두 번이나 결혼했고 자식도 있었다. 여자를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정감 있는 시를 쓴 게 아닌가.
‘밤’과 ‘새벽’, ‘길다’와 ‘짧다’의 대비가 절묘하고 1연과 2연의 1‧2‧4 행이 거의 완벽한 대구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인이며 승려이며 독립운동가…,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내가 만해의 시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밤 근심이 하 길기에”의 ‘하’에 나는 탄복했다. ‘하’가 들어가야 운율이 맞는다. 만해의 시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서른 무렵에 만해의 시를 즐겨 외웠다.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뭔가 통하는 게 있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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