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카테고리 없음

[시로 가꾸는 정원] 꽃아, 가자 - 김점용(1965~) [조선/ 2020.12.14]

설지선 2020. 12. 14. 09:42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꽃아, 가자 - 김점용(1965~) [조선/ 2020.12.14]

 

 

    꽃아, 가자 - 김점용(1965~)

     

    꽃아, 가자

    네 온 곳으로

    검은 부르카를 쓰고

    아무도 몰래 왔듯

    그렇게 가자

     

    검은 우물 속이었을까?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 그 아래였나

    푸른 별을 타고

    색 묻지 않은 별빛을 타고 돌면서

    삼천대계를 돌면서

     

    꽃아, 가자

    혼자 싸우듯

     

    아무도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몰래

    네 온 자리

    색 입지 않은 곳

    볕 뜨지 않은 곳

    가자, 꽃아

 

 

대설(大雪)도 지나서 이제 동지로 향하는 한겨울입니다. 정원에는 그 어떤 꽃도 잎도 없습니다. 흥성하던 색과 향도 흔적이 없어서,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듯이 그저 맑고 고요합니다. 찾아와 놀던 벌·나비는 또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간 것인지.... 허나 아직 꽃이 있어서, 또 향기와 벌· 나비도 있어서 이 ‘적멸의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때에 ‘꽃아, 가자’고 재촉하는 이가 있으니 자신이 아직 ‘꽃’의 시절인 때문입니다. ‘검은 우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꽃, ‘밤새 울던 풍경’ ‘먼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정이 있는 꽃입니다. 그리고 ‘푸른 별을 타고’ ‘삼천대계를 돌면서’ 가자고 청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색 묻지 않고, 색 입지 않은’이라는 전제입니다. 짓누르는 아픔이 깃든, 몸뚱이를 벗은 자리의 선취입니다. ‘색즉시공’! ‘아무도 부르지 말고/아무도 몰래’ 가자니! 처연한 눈물 자국입니다. 큰눈이 오리라는 예보입니다. 꽃은 그렇게 몸 바꿔 내려오는 거, 시인은 압니다. ‘네 온 곳’, 원래 있던 자리로 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 꽃 먼저 보내고 더디 가길 원합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