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추운 사랑 ― 김승희(1952∼ ) [동아/ 2020-11-21]
추운 사랑 ― 김승희(1952∼ )
아비는 산에 묻고
내 아기 맘에 묻네,
묻어서
세상은 재가 되었네,
태양의 전설은 사라져가고
전설이 사라져갈 때
재의 영(靈)이 이윽고 입을 열었네
아아 추워-라고,
아아 추워서
아무래도 우리는 달려야 하나,
만물이 태어나기 그 전날까지
아무래도 우리는 달려가야 하나,
아비는 산에 묻고
내 아기 맘에 묻어
사랑은 그냥 춥고
천지는 문득 빙하천지네……
소설은 재미라도 있지, 수필은 이해라도 쉽지. 시는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다. 시를 안 읽어도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속상할 때 읽는다. 시 속에서 비슷하게 속상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발견하면 슬며시 의지하려고 찾는다.
뉴스를 보니 얼마 전에 한 아이가 죽었다. 또 얼마 전에는 다 못 자란 아이가 죽었다. 언제는 이름 모를 A 씨가, 또 B 씨가 죽었다. 생때같은 목숨이 아까워서 기사를 찾아 읽고 읽다 끝내는 시를 읽는다. 40년 전에 나온 얼어붙은 사랑 노래를 읽으며 40년 후의 마음 한 조각을 거기서 발견한다. 동우회 사이트에 억울하다 글 올리고, 청원에 댓글 다는 심정도 시를 읽는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사랑도 춥고 세상도 춥다. 같은 일에 화내고, 같은 일에 슬퍼하는 마음 조각들마저 찾지 못한다면 얼마나 더 추울까. 시 속에서는 언제든 오늘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혼자여도 마음만은 혼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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