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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동아/ 2020-10-17]

설지선 2020. 10. 17. 08:5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동아/ 2020-10-17]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창과 빛이 있으면

    시를 쓸 수 있지

    저 창에 쏟아지는 빛으로

    질서를 말할 수 있고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빛으로

    환대를 말할 수 있고

    나의 몸을 떠난 채

    등 돌리고 있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떤 날에는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게

    말을 걸 수 있고

    그 한마디에

    길게 심장이 열릴 수도 있고

    열린 심장에서 흰말부리가

    지저귈 수 있고

    그 지저귐을 들은 벌새가 날아와

    삶을 위로할 수 있고

    장밋빛 눈물을 물어올 수 있다

     

    눈 없는 나의 발이

    그런 눈물을 흘릴 수 있지

     

    그러나 그

    창과 빛 아래서

    신을 찾는 네가

    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

    그건 신도 모를 일이다

     

    떠들었을 때

     

    나는 네가 찾는 신이 될 수도 있고

    영혼을 수집하는

    빛이 될 수도 있었겠지

     

    빛의 태피스트리를

    보던 너의 얼굴이

    다 해지고

    물결을 짜던 나비의 사체가

    가라앉을 때쯤

     

    창문과 빛에서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테고

     

    여전히 떠들고 있는

    네 육체를 보며

     

    창문과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한다

     

    저 빛에는 그림자가 있고

    저 바람에는 등잔이 있고

    저 창문에는 신의 궁륭이 있고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도 있었겠지

     



    인간의 품위가 뭐냐고 묻는

    너에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이라는

    환상에 대해

    어떤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럴 때면 너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왜 내게는 없는 것이냐고 물었다

     

    품위가 우리 곁에서

    잠시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려는

    나에게

    너는 그것을 찾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창가에 앉아

    창과 빛이 있으면

    그만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너를 보며 다정하고

    까마득하게 웃을 뿐이었다

 

궁금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의 하나다. 궁금해서 뉴스를 보고, 드라마 다음 회를 기다린다. 궁금한 것 중 하나가 마음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마음을 꽁꽁 싸매 감춰 두지만 시는 정반대다. 마음을 글자로 풀어놓은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읽고 싶은 날은 시 읽기 좋은 날이 된다. 사각사각, 시집 넘어가는 소리 사이에는 늘 마음이 녹아 있다.

그래서 조금 길지만 이 시를 꼭 소개하고 싶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시, 마음만으로도 꽉 차 있는 시다. 원문은 더 길지만 오늘은 조금만 따왔다. 품위를 잃어버려 슬픈 한 인간과 그 인간을 달래는 더 슬픈 인간의 이야기가 여기 적혀 있다. 인간으로서 내가 지닌 품위는 어디에 있나요? 물어보는 ‘너’는 꼭 어제의 우리와 같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다정하게 웃을 뿐인 ‘나’는 꼭 오늘의 우리와 같다.

 

‘품위’라는 말을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덕목들은 점차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뜻은 알아도 품위 있는 사람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중에는 고어사전에나 남아 있으려나. 우리가 가졌고 사랑했으나 잃어버리고 있는 좋은 말. 김소형 시인의 다정함 덕분에 오늘은 ‘품위’라는 말을 되뇌어 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