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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동아/ 2020-07-04]

설지선 2020. 7. 4. 08:5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동아/ 2020-07-04]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근래에 발견한 시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시를 소개한다. 이 시에는 우리가 막 지나온 6월이 있고, 잃어버린 수국이 있고,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제주가 있다. 알고 있으나 닿을 수 없는, 좋긴 하지만 누릴 수 없는 것이 세 가지나 들어 있다. 그러니 시를 통한 간접 경험이 나쁠 리 없다. 눈앞이 시원해지는 이미지나 사진을 보는 대신 이 시를 읽어 보시라. 가고 싶은 곳, 제주의 정취를 잠깐이나마 빌려올 수 있다.


게다가 이 시는 몹시 상큼하기도 하다. 사실, 상큼하다는 말은 시에 흔히 붙는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학은 엄숙주의 경향이 강한 전통 위에 있고 특히 감정을 다루는 시에서는 불행의 힘이 행복의 힘보다 더 세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서도 지난날을 돌아볼 때 즐거움보다 고통의 흔적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런 사랑스러움, 적절한 발랄함, 소소한 위트가 적절히 어우러지는 경우는 적어도 시에서는 드물다. 발랄하다고 해서 마냥 가벼운 시만도 아니다. 꽃과 제주와 시인이라는 삼박자가 어울려 하나의 꽉 찬 그림이 완성돼 있다.

이 시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자기소개서,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소개와 초대라니 코로나19 시국에 얼마나 드물고 간절한 말인가. 간질간질한 이 소개와 초대를 시 속에서 즐겨 보시길 바란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