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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잘못에 과속 겹친 ‘위험한 운전’ - 박민 부국장 겸 정치부장 [문화/ 2018-09-19]

설지선 2018. 9. 19. 09:21

방향 잘못에 과속 겹친 ‘위험한 운전’ - 박민 부국장 겸 정치부장 [문화/ 2018-09-19]


인구 700만 명 王朝에도 불구
세종, 稅法 개정에 17년 소통, 250년 지속 세제의 기틀 닦아

文정부 실험하듯 국정운영하다 경제·안보 분야 정책 실패하면
치명적 국가위기 초래할 수도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세종의 세제 개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받게 된다. 추수기 관리들이 들판에 나가 수확량의 손(損)과 실(實)을 헤아려 세금을 매기도록 한 답험손실법이 취지와 달리 관리들의 농간으로 농민 피해가 늘어나고 국가 재정의 부실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이에 세종은 평균 수확량에 근거해 일정량을 세금으로 내게 하는 ‘공법(貢法)’이란 개혁안을 만들어 조정회의에 부쳤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농민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농민이 싫어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선의’는 인정하겠지만 ‘여론’은 알 수 없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해 세종은 재위 12년(1430년) 고관으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세계 최초의 대규모 전국 여론조사 결과는 찬성이 9만8657명(약 57%), 반대가 7만4149명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반대가 상당히 많다’는 이유로 부결시켰고, 세종은 농민에게 더 유리한 개정안을 만들어 조정회의에 부쳤다. 신하들은 이번엔 ‘시범 실시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3년의 시범 실시 결과가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나자 ‘시범 실시 지역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다시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요즘 국회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발목잡기’였지만 세종은 하삼도(충청·호남·영남) 시범 실시를 지시했고 역시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공법이 채택된 것은 논의가 시작된 지 17년 만인 1444년(세종 26년)이었다. 그 결과 공법은 세종 이후 250년간 조선왕조의 세제의 기틀로 자리를 잡았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중심으로 하는 ‘포용성장정책’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세종의 공법처럼 향후 경제정책의 기본 틀로 굳히겠다는 것이다. 세종 시대 인구는 700만 명 선. 당시 소득수준까지 감안하면 경제 규모는 현재의 수백 분의 일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 산업구조는 농업 중심 단순 구조였고 대외의존도도 낮아 경제정책에 영향을 줄 변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반면 현재 우리 경제는 세계 10위권 규모에 산업구조는 세종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다양화·고도화됐고 대외의존도(국민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율) 역시 84%(2017년)에 달한다.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칠 변수와 각 변수의 경중은 전문가도 자신 있게 가늠하기 힘들다. 더구나 소득주도 성장정책은 대부분의 전통 경제학자들이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있고, 시작 전부터 상당수 경제 주체가 반대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여론 수렴이나 시범 실시 과정을 아예 생략했다. 시행 14개월이 지나면서 고용 참사와 소득 양극화 심화라는 정책목표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구체적 근거를 대지 못한 채 ‘연말이면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책 운영 기조가 우리 생존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영역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은 선진국일수록 국정 우선순위에서 제일 앞에 두는 민감한 분야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비전문가들의 주장에 근거한 ‘탈원전 정책’을 각종 편법까지 동원해 추진하고 있고 그 결과 에너지 수급의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와 함께 국가 안위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 안보 영역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비핵화와 대북 정책 간 균형을 외면한 채 남북관계 개선에 지나치게 속도를 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북한의 선의만 믿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나 비무장지대(DMZ) 내 공격적 병력 운용 변화 등의 군축을 시도하는 것은 북한의 핵 보유로 인해 기울어진 군사적 불균형을 심화하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무모하고 위험한 실험이다. 북핵 문제의 본말과 선후가 모두 뒤바뀐 것이다.

국정 운영은 권력자의 선의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고, 이념이나 소신을 실험하는 과정이 돼선 더더욱 안 된다. 특히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의 실패는 곧바로 국가 위기 상황으로 이어진다. 문 정부가 현재와 같이 일방·과속의 국정 실험을 고집하면 머지않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올가을이 마지막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