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청포도 ― 이육사(1904∼1944) [동아/ 2018-07-07]
청포도 ― 이육사(1904∼194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시인들의 대표 시집을 이것저것 들춰보는데 손에 잡힌 이육사의 선집이 유독 얇다. 그에게는 시를 쓸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상에 머문 시간은 겨우 40년이었다. 시인의 길 하나에 매진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어떤 목표보다 민족과 독립이라는 절절한 마음이 먼저였다. 당시 문인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 육사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말술이면서도 어느새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육사가 연인을 만나러 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 연인은 사람이 아니라 독립이었을 것이라고, 육사를 가장 사랑했던 친구 시인 신석초는 훗날 회상했다.
다정한 친구들을 뒤로하고 밤길을 걷던 육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는 퇴계의 후손이고 영남의 명문가라는 타이틀을 개인 영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집안과 명예를 통해 바르게 배운 대로 삶을 살아나갔다. 쓸쓸한 그의 밤길을 비추던 것은 시 ‘청포도’와 같은 빛이었다. 사람을 비추고 인도하는 크고 바른 빛을 우리는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 시가 위대한 건 바로 그 이상이 태양만큼 밝기 때문이다. 저런 불빛들에 기대어 우리는 엄혹한 시절을 건너왔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을 때면 미안하고 고맙다. 7월이 되었음을 핑계 삼아 그 불빛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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