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가마귀의 노래 ― 유치환(1908∼1967) [동아/ 2016-11-04]
가마귀의 노래 ― 유치환(1908∼1967)
내 오늘 병든 짐승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을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여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朔風)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아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갖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두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 살아
오욕을 팔아 인색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
이런 시를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지 의문이다. 유치환의 시는 다정다감하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다. ‘…도다’, ‘…노라’로 끝나는 말투는 마치 회초리를 든 훈장님 같아서 도통 정이 가지 않는다. 쓰는 단어들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시에서도 ‘늠렬(凜烈)’이라는 한자가 참 어렵다. 이 말은 ‘추위가 살을 엘 정도로 매섭다’는 뜻인데 일상에서 자주 찾아볼 수 없다. 또 ‘육시’라는 단어는 무섭고 처절한 복수의 형벌을 의미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고집이 센 시이지만 작품에 담긴 시정을 알게 된다면 분명 우두커니 멈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가마귀’는 시인 자신을 뜻한다. 그는 자신을 잘난 것 없고 무뚝뚝한 가마귀에 비유하곤 했다. 가마귀는 홀로 추운 곳에서 고난을 자처하고 있다. 벌판으로 나와 굳이 삭풍을 맞는 이유는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서이다.
대체 그는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일까. 가마귀가 살던 시대에는 “모두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과 영혼을 팔아 돈을 얻었나 보다. 그리고 가마귀 역시 그런 시류에 잠시 눈이 흐려질 뻔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벌하면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람은 굶어 죽을지라도 영혼과 마음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증오와 정결을 아는 가마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삭풍이 뺨을 스칠 때면 그 가마귀가 그리워진다.[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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