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목숨 / 유치환(1908∼1967) [동아/ 2016-01-22]
목숨 ― 유치환(1908∼1967)
하나 모래알에
삼천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星芒)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 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 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 데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飄飄)한 이 즐거움이여
시를 들고 찾아온 한 학생이 물었다. 왜 우리 시에서는 강하고 웅장한 시인이 없나요. 왜 다들 애상적이고 절망적인가요. 짐작건대 이 학생은 지친 자신을 퍼뜩 깨어나게 할 대갈일성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에 추천해 줄 시인은 많지 않다. 많지 않지만 그중에 유치환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청마 유치환의 시 스타일은 사자후에 가깝다. 사자의 울부짖음이라는 뜻이다. 어떤 말씀이라든가 호통이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유치환의 시는 목소리가 크고, 스케일이 웅장하며, 굵은 진리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목숨’이라는 이 시를 한 번 보자. 첫 연은 땅에서 시작한다. 몹시 작은 모래알에도 몇억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둘째 연은 하늘에서 시작한다. 반짝이는 성망, 즉 별빛은 유구한 역사의 변천을 지켜봤다. 만물이 죽고 살고 태어나고 사라지는 긴 역사의 끄트머리에, 변함없고 광대한 우주 사이에, 작은 내 목숨이 놓여 있다. 시인은 이때 웃는다. 너무나 큰 시간과 공간 사이 모래알처럼 작은 목숨은 허허허 웃는다.
이때 ‘작은 목숨’은 초라할까. 아니, 이 시는 몹시 자유롭고 시원해 보인다. 하늘 아래, 땅 위에 태어나 지금 내 목숨이 존재한다는 말은 매우 단단하게 들린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압박당하는 목숨은 초라하지만, 갑과 갑 사이에서 작아지는 을의 모습은 서글프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작은 목숨’은 초라한 것이 아니다.
원래, 목숨은, 초라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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